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체재공 선생 뇌문비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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채제공 선생 뇌문비
채제공 선생 뇌문비
채제공 선생 뇌문비각
채제공 선생 뇌문비각
채제공의 죽음을 애도하며 정조가 내린 제문 채제공 선생 뇌문비 채제공(1720∼1799)의 호는 번암(樊巖), 혹은 번옹(樊翁)이며, 조선 후 기 영조·정조 때의 문신이자 명재상으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. 그는 15 세 때 향시에 급제하고, 23세 때인 영조 19년(1743) 문과에 급제한 후,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. 예문관 사관과 충청도 암행어사를 지냈으 며 도승지·병조판서·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우의정·좌의정·영의정을 지 냈습니다.

도승지로 임명된 해 영조와 그 아들인 사도세자의 사이가 악화되어 세자를 폐하는 비망기가 내려졌는데, 채제공이 목숨을 걸고 이를 막아 철회시켰습니다. 후일 채제공이 모친상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후 사도 세자가 돌아가시게 되었지만, 이때 사도세자를 향한 충심을 확인한 영 조는 손자인 정조에게 ‘채제공은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자 너의 충신’이 라고 하였습니다.

그는 재상으로 일했던 10여 년 동안 여러 분야에 걸쳐 정조를 보필하 였는데, 상업을 확대하고 신도시 화성을 건설하였습니다. 정조는 채제 공이 세상을 떠나자 슬퍼하며 몸소 애도의 글을 지어 내렸는데, 그 글 이 바로 정조 23년(1799)에 세워진 〈채제공선생뇌문비〉에 새겨져 있 습니다. ‘뇌문’이란 왕이 신하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손수 고인의 공적 을 높이 기리기 위해 쓴 조문 형식의 글이고 그 글을 비석에 새긴 것이 ‘뇌문비’입니다.

뇌문비는 채제공의 묘소 아래에 건립된 비각 안에 있습니다.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, 지붕돌을 얹었는데, 받침돌과 지붕돌은 화 강암이며 비석의 몸돌은 검은 빛깔의 오석으로 되어 있습니다. 비문을 쓴 사람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, 비문은 정조의 필체로 보이며 비 의 명칭은 허목의 글씨체로 짐작됩니다. 비각은 정면, 측면 각 1칸으로 팔작지붕입니다.

비문에는 채제공의 공적을 기리는 내용과 애도의 마음이 담겨있는데, 서두에 “소나무처럼 높고 높아 우뚝 솟았고, 산처럼 깎아지른 듯 험준하 여라”라고 칭송하였고, “그 기개는 엷은 구름같이 넓고, 도량은 바다를 삼킬 듯 크다”고 하였습니다. 이어서 정조는 “경(채제공)을 알고 경을 씀 에 내 독실하게 믿었노라”, “조정에 노성(老成, 채제공)이 없다면 국가를 어찌 보존하랴. 또한 어버이에게 효도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니 경 같은 이는 매우 드물도다” 하고 채제공의 죽음을 슬퍼하였습니다.
채제공 선생 뇌문비각(사진 : 문화재청)
채제공 선생 뇌문비각(사진 : 문화재청)
채제공 선생 뇌문비는 용인 경전철 김량장역 1번 출구로부터 낙은로 를 따라 북쪽으로 약 500m 올라온 후 낙은로50번길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오면 찾을 수 있습니다.